본문 바로가기

위안부 기본글쓰기

잊을수 없는 쓰라린 역사, 잊어선 안될 그날의 기록.

기획(경기)

[아트브리지&人·6]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잊을수 없는 쓰라린 역사, 잊어선 안될 그날의 기록
10년째 역사관 이끈 안신권 소장… 행정업무에 대회활동까지 전담
데스크승인 2012.03.01 지면보기 민정주 | zuk@kyeongin.com
광주시 퇴촌면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안신권 소장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화상을 표현한 작품 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캔버스의 대부분을 새파란 망망대해가 차지하고 있다. 너무 새파래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바다다. 캔버스 왼쪽에는 시커먼 배가 떠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조선의 처녀들이 그 배에 타고 있다. '끌려가는 조선처녀'라는 제목의 이 그림을 그린 이용녀 할머니도 그 배에 타고 계셨으리라….

이 그림이 다만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 예술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지는 명화였다.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어느 예술가의 그림에서도 이런 명확함은 느낄 수 없었다. '정신대', '위안부'라는 말을 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그림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림에서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배어나왔다.

역사가 예술이 돼 숨쉬는 곳, 광주시 퇴촌면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과 안신권 소장이 이번 '아트브리지 人'의 주인공이다.

▲ 이용녀 할머니作 '끌려가는 조선처녀'.

■ 역사관에서의 10년

안 소장은 2001년 역사관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건설업계에 종사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언론에 보도되는 만큼만 알고 있었다. 그해 12월, 알고지내던 스님과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사무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딱했다. 1998년 만들어진 역사관의 행정업무를 전문적으로 맡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박봉에 주말없이 매일 야근을 감내하며 일할 사회복지사를 찾는 것이었다. 오히려 봉사하는 마음으로 찾아와 일하겠다는 일본인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안 소장이 온 뒤 전반적으로 운영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10년째 이곳 살림을 도맡아 나눔의집에서 할머니들을 돌보고, 역사관을 관리하고 행정업무에 대외활동까지 해내고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남성들한테 고통받는 할머니들을 대하기가 편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들은 안 소장을 무척 예뻐하신다. 일부러 식당에 가서 '안 소장 밥 많이 주라'고 말씀을 넣어두시기도 하고 일하고 있는 안 소장을 보면 "일본놈들한테 항의편지 쓰느라 고생한다"며 응원을 해주시기도 한다. 오히려 여성 사회복지사들이 혹독한 시집살이(?)를 못 견디고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며 은근히 자랑을 한다.

그러나 역사관을 운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전문지식이 부족했다. 1998년 역사관에 다녀간 오키나와 향토사 연구자 쿠니요시 이사무 등이 삿쿠(콘돔), 군표(군용수표) 등을 자료로 기증했다. 귀한 자료였다. 그러나 2002년 다시 방문한 기증자에게 크게 질타를 받았다. 보관이 허술해서였다. 지금은 이중 유리관에 보관하고있다. 다른 유물들을 위해서도 항온항습 기능을 갖춘 수장고를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

▲ 역사관 내부에 전시된 그림들.

오사카 인권 박물관에 그림을 전시할 때도 안 소장은 일본인들에게 놀랐다. 작품 원본을 공수하겠다기에 훼손 우려가 있어 거절했다. 그러자 보험은 물론 미술품 전용 운반상자에 작품을 담아 이동하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상자를 역사관에 기증했다. 안 소장은 "전문성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운영하며 실수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과 교류하며 발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10년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안 소장이지만 한 해 한 해가 아쉽기만 한 이유는 우리 국민에게 역사교육의 장이 되도록 만든 역사관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해 우리나라 관광객 7천명 중 6천명이 봉사활동이나 견학을 온 중고등학생이다. 나머지 1천여명은 교사, 교수이거나 단체 등이 온다. 일반 나눔의 집 방문자들은 관람료를 내야한다는 이유로 역사관을 외면하기 일쑤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해 2천명이 넘게 찾아온다. 얄밉게도 이들은 공부도 많이 해오고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로 자료 하나하나를 뜯어 보며 제대로 알고 간다. 어떤 일본인은 "피해자가 생존해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살아있는 역사관"이라며 극찬을 하고 갔다고 한다.

안 소장은 "역사관은 예술적이든 역사적이든 가치를 따질 수 없을만큼 중요한 기록의 장"이라며 "우리가 바로 알고 아껴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 돌아올수 없었던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상징화한 작품.

■ 아직 현재 진행형인 역사의 기록

1995년 광주시 퇴촌면 지금의 자리에 일본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생활시설인 '나눔의 집'이 옮겨 오고 3년 후,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사관이 건립됐다. 아픈 우리의 역사와 그 역사의 피해자들이 마주보고 살고있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들은 역사관에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말씀처럼, 이 역사관은 할머니들의 힘과 용기가 없었다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 소장은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피해 상황을 알리고 힘을 모아야 하는데 증언자인 할머니들이 건강상태도 좋지 않고 국내에는 관련 자료도 부족했다"며 "특히, 일본인 방문자들에게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역사관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역사관 장소로는 실제로 위안소로 쓰였던 곳이 가장 좋겠지만 국내 위안소는 지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할머니들이 계신 이 곳에 역사관을 짓게 됐다"고 역사관 장소 선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역사관에 전시된 할머니들의 작품은 나눔의 집이 서울 서교동에 있을때 시작한 그림교실에서 탄생했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할머니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이름조차도 쓸 수 없던 상황이었다. 자원봉사자 이경신 화가의 도움으로 나눔의 집 할머니들 모두 그림교실에 참가했다. 그 중에서도 김순덕, 강덕경, 이용녀 할머니는 끈기있게 그림에 몰두했다. 할머니들은 단순하게 사실을 묘사하는 수준부터 시작해, 차츰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지금 역사관에 전시된 그림은 1993~95년 사이 그려졌다. 할머니들은 이제 더이상 그림을 그릴 기력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들은 여전히 역사의 증인이고 살아있는 역사다. 93주년 3·1절이 돌아왔다. 올 봄에는 할머니들이 간절히 바라는 그 한마디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韓·日 시민들 모금으로 설립 세계 최초 성노예 인권박물관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세계 최초의 성노예 테마 인권박물관으로서, 잊혀져 가는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를 고발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회복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지난 1998년 8월 14일 개관했다. 지상 2층, 지하 1층, 모두 343㎡ 규모로 마련된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건설업체 회장이 건물을 기증하고 한국·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순수 민간의 힘으로 설립·운영되고 있다. 잊혀진 역사를 바로 세워 후대에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역사자료를 전시하고 다양한 교육사업, 연구조사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은 앞으로 추모관과 국제평화인권센터 건립 등을 계획하고 있다.

역사관은 제1~6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기초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시한 '증언의 장', 위안소 모형을 복원한 '체험의 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과 단체 등을 알리는 '기록의 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이 그린 그림과 관련 작품이 전시된 '고발의 장',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핸드프린트 패널이 걸린 '정리의 장' 등으로 정리돼 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기사원문보기 :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637705